• (국민일보)[한국전쟁 68주년]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사투, 흥남작전은 주님이 이끄신 역사” 2019-04-12

    “더 많이 죽이고 더 많이 파괴하려고 목숨을 내건 전쟁터에서 생명 하나를 건져내기 위해 사투를 벌였지요. 돌아보면 그때 작전은 하나님이 이끄신 역사의 한 장면이었던 것 같습니다.”망백(望百)의 노병은 68년 전 함경남도 흥남에서 겪은 일들을 생생하게 꺼내 놨다. 노병은 로버트 루니(91) 예비역 제독. 그가 말한 작전은 ‘흥남철수작전’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북진했던 미군과 한국군이 피란민과 함께 흥남항에서 선박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군수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투입됐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의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선장이 군수품을 항구에 내려놓고 1만4000여 피란민을 태워 경남 거제도까지 이송하는 장면은 영화 ‘국제시장’의 모티브가 돼 감동을 줬다.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가 주최한 ‘제68주년 한국전 기념 해외 참전용사 초청 보은행사’ 참석 차 지난 16일 방한한 루니 제독은 당시 빅토리호의 1등 항해사로 조타실을 지켰다. 18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만난 그는 “흥남항에 도착했을 때 장진호에서 철수한 미군과 한국군 10만여명, 차량 1만7000여대, 군수물자 35만t이 그득했다”면서 “하지만 가장 놀란 광경은 항구로 밀려오고 있던 20만여명의 피란 행렬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초 군 병력만 철수하려던 작전은 라루 선장의 명령으로 전격 수정됐다. 고(故) 김백일(국군 1군단장) 소장, 현봉학(미 제10군단 민사부) 고문의 거듭된 피란민 구출 요청도 힘을 보탰다.“라루 선장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배에 있는 무기를 모두 버리고 빠짐없이 승선시켜라’. 16시간에 걸쳐 군수물자 하역과 피란민 승선이 이어졌습니다. 선원들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한국말 ‘빨리빨리’를 수천 번 외쳤습니다. 그렇게 빅토리호는 희망을 싣고 23일에 출항했죠.”빅토리호는 혹한의 날씨와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을 딛고 항해한 끝에 25일 거제도에 도착했다. 그 사이 선상에선 5명의 아이도 태어났다. 루니 제독은 “수술 도구도 없는 배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태어난 기적 같은 생명이었다”며 “당시 미군들은 태어난 순서대로 ‘김치1’부터 ‘김치5’까지 별명을 붙여 축하해줬다”고 설명했다.그는 “사람들은 흥남철수작전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 구조’라고 칭송하지만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라고 했다. 이어 “라루 선장도 참전 후 만난 자리에서 ‘위기와 모험뿐인 항해였지만 주님의 손이 배의 조타 핸들을 잡고 있음을 확신했다’고 회상했다”고 덧붙였다.피란민 중엔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와 누나도 탑승하고 있었다. 루니 제독은 문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취임 후 처음 방미했을 때 버지니아주 콴티코 국립해병대박물관 ‘장진호전투 기념비’ 앞에서 자신과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빅토리호가 없었다면 자신도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면서 제 손을 잡아줬지요. 그러면서 ‘참전 용사들이 생존해 있을 때 한반도 통일을 지켜볼 수 있게 지도자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어요.”루니 제독의 왼쪽 가슴엔 한국과 미국 국기가 펄럭이는 모습의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는 배지를 어루만지며 흥남철수작전 때 가슴에 품었던 성경 구절을 소개했다.“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67641

  • (국민일보)[한국기독역사여행] 흥남의 크리스마스 기적 … 9만 2000명 살리다 2019-04-12

    출근길. 퇴계로를 지나 서울 여의도로 향하는 버스가 지하철 서울역 6번 출구 즈음에서 신호 대기를 받곤 했다. 그때마다 차창 밖 동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2.5m 동상은 연세대세브란스빌딩 앞에 서 있었다. 옛 서울역 고가도로 ‘서울로7017’에서도 내려다보였다. ‘현봉학 박사 상’. 현봉학은 1950년 흥남철수대작전 때 미군을 설득해 9만2000여명의 피란민을 탈출시킨 전쟁 영웅이다. 그해 성탄절을 앞둔 이 작전을 두고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칭한다. 사람들은 당시 미10군단 통역이었던 28세 의사 청년 현봉학의 인도주의적 사랑 실천을 두고 ‘한국판 쉰들러리스트’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한국의 모세’라고도 했다. “장군 부탁드립니다. 제발 우리 국민을 도와주세요. 그냥 떠나버리면 피란민들은 중공군에게 몰살 당하고 말 겁니다.”(영화 ‘국제시장’ 초반부)이 대사는 통역관 현봉학과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의 대화를 극화한 것이다. 현봉학의 눈물겨운 호소에 알몬드는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란민을 태운다. 당시 해병대 부대장으로 현봉학의 통역을 통해 미군과 작전을 펼쳤던 김성은(2007 작고) 전 해병대사령관은 ‘한국판 모세 사건’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6년 현봉학 동상 제막식에서 그 대탈출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해 흥남부두에 모여든 인파 가운데 문 대통령 부모와 어린 누나가 승선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탈출한 문 대통령 부모는 거제에 정착했다. 문 대통령은 1953년 생이다.그런데 모세와 같은 영웅의 동상이 왜 저 빌딩 앞에 자리하고 있을까. 지금의 연세대세브란스빌딩은 옛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세대 의대 전신) 터이고 현봉학이 이 학교 출신 의사이기 때문이다. 1885년 조선 정부로부터 병원과 학교 설립을 허가 받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선교사들은 1904년 제중원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칭하면서 병원과 의학학교를 사대문 안에서 남문(숭례문) 밖 복숭아골(현 도동 일대)로 이전했다. 도성 밖 이전은 구제를 위한 민중병원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함이었다. 병원 부지에는 병동과 의학학교, 교회가 근대건축공법으로 들어섰다. 첫 근대병원 자리에 ‘한국판 모세’ 동상 현봉학은 목사 현원국(1937년 작고·함흥 영생여고보 교목 등 역임)과 신여성 신애균(한국장로교여전도회장 역임) 사이에 태어난 6남1녀 중 셋째 아들이다. 그의 형이 민중신학자 현영학(1921~2004)이고 동생이 해군 창설의 주역이자 호국인물인 현시학(1924~1989) 소장이다. 함흥YMCA 초대 회장 등을 지낸 현원국은 믿음과 현실이 분리되는 삶을 살아선 안된다며 청년층의 가슴에 성령의 불을 질렀다. 선지자적 삶을 살아가던 그는 이화여전 수양회 설교를 준비하다 별세했다. 설교집 ‘생명의 종교’가 1938년 기독교서회에서 출판됐다.현봉학은 함흥 중앙교회 주일학교를 다니며 성장했다. 현봉학은 “아버지는 ‘기독교인의 용기야말로 종기에서 돋는 새살처럼 교회를 재생하고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 기독교인의 사명은 예수께서 남기신 사랑실천의 미완성을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기록했다. 현봉학은 함흥고보 우등생이었다. 2학년 때 조선어 과목이 폐지됐고, 신사참배를 해야 했으며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탄압 대상이었다. “아무리 반발하는 마음이 강해도 그것을 드러낼 수 없었던 우리의 비극과 나약함이 슬프고 서러웠다”고 술회했다.그럼에도 교회와 학교에는 늘 기독교정신으로 살아가는 선생들이 있었고 심지어 일본인도 있었다. 그는 기도하는 청년으로 살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함흥고보 졸업 후 세브란스의전에 진학했다. 캐나다장로회 조선선교부가 현봉학 등 우수한 청년들의 학비를 도왔다. 그는 병원 및 학교 교회인 남대문교회 찬양단원 등으로 활동하며 예수 닮길 원했다. 무엇보다 병 고치는 은사에 충실했다.지난 23일 ‘서울로7017’에서 바라본 근대의학의 산실 옛 세브란스병원 일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근대도시 조성을 이유로 병원 부지 사이로 길을 뚫었다. 지금의 퇴계로 시작점이다. 현 연세대세브란스빌딩 뒤편 도동과 퇴계로 입구, 봉래동 남대문교회 일대는 한국교회사의 의미 있는 땅이고 그 땅 한가운데 현봉학 동상이 건립된 셈이다. 순례길로 꼽아도 손색없다. 현봉학은 세브란스의전 시절 남대문교회 집사 가정의 가정교사로 입주해 생활하며 후암동 가마쿠라보육원(현 영락교회 사회복지시설 영락보린원) 주일학교 교사로도 봉사했다. 가마쿠라보육원은 한국인을 사랑한 일본인 목사 소다 가이치(1867~1962·국민일보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50949

  • (경향신문) 한국 쉰들러’ 현봉학 박사 기념사업회 창립 2018-04-19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빌딩 앞에 세워진 고 현봉학 박사 동상. 국가보훈처 제공   한국전쟁 당시 대규모 피란민 구조에 기여한 고 현봉학 박사를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창립된다. 국가보훈처는 1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빌딩에서 현봉학 박사 기념사업회 창립식을 개최한다고 18일 밝혔다. 창립식은 현봉학 박사 동상 건립 1주년 기념식을 겸해 진행된다. 피우진 보훈처장, 한승경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비롯해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피 처장이 문재인 대통령 축사를 대독한다.  현 박사는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에서 피란민 10만여명을 남쪽으로 이송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1950년 12월 중공군 공세가 거세지자 동북부전선(함경북도 일대)에서 작전 중이던 국군과 유엔군은 흥남항을 통해 대규모 철수작전을 시행했다. 군단장 통역을 맡고 있던 현 박사는 철수작전을 책임지고 있던 알몬드 소장(당시 미 10군단장)에게 민간인 수송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현 박사가 끊임없이 간청하고 설득한 끝에 알몬드 소장은 민간인 수송을 결정했다. 특히 흥남항을 떠나는 마지막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23일 배에 실려있는 군수물자 25만t을 버리고 1만4000명의 피난민을 태워서 경남 거제로 피난했다. 이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흥남철수작전은 약 10일간 193척의 군함으로 10만5000명의 병력과 10만명의 피난민을 남쪽으로 이송했다. 이 때문에 현 박사는 ‘한국의 쉰들러’로 불린다.                 문재인 대통령은 흥남철수작전 당시 부모님이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탔던 피란민이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현 박사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181031001&code=910302#csidxc8a1bbe9fd93d2da79f80a8fe1b6fc3

  • (문재인대통령 공식블로그) 흥남철수의 영웅, 현봉학 선생 동상 제막식 참석 2018-04-05

    현봉학 선생은 흥남철수 당시 수많은 피난민을 구출해 한국의 쉰들러로 불립니다. 그는 1950년 12월23일 흥남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P. 라루 선장에게 최대한 많은 수의 피난민들을 태워 구출해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고, 이에 탄복한 선장이 배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태울 수 있는 만큼 태워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 ‘국제시장’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전 대표의 부모님도 바로 이 흥남철수 작전 덕분에 배를 타고 북한을 탈출해 거제로 올 수 있었습니다. 현봉학 선생의 이야기는 문재인 전 대표의 아픈 가족사가 얽힌 사연이 있는 뜻깊은 행사였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현봉학 박사님을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특별한 인연이 있고 오늘 동상제막에 있어서 특별한 감회가 있어서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첫째는 저희 집안은 원해 함경남도 흥남이 고향입니다. 현봉학 선생님도 함경도 분이고 저희 아버님하고 연배가 같아서 비슷한 시기에 같이 함흥에서 현봉학 선생님은 함흥고를 다니시고 저희 아버님은 함흥농고를 다녔는데 함흥고과 함흥농고가 그 당시 함경도 전체를 통틀어서 양대 명문이었기 때문에 저는 현 박사님과 저희 아버지가 서로 알지 않았을까. 만났을 수도 있었겠다, 그런 감회를 가집니다.   또 하나는 아까 여러 번 소개된, 그때 모여든 십만 명의 피난민 가운데 저희 부모님과 제 누님도 계셨습니다. 그때 현봉학 박사님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북한 공산 치하를 탈출하고 싶어했던 그 십만 명의 피난민들이 여기 대한민국으로 내려올 수 없었을 겁니다. 저희 부모님도 내려오지 못했겠죠. 저는 피난 후에 거제에서 태어났습니다만 아마 저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봉학 박사님은 흥남부두를 피해서 피난 온 십만 명의 피난민들, 피난 후에 태어난 2세들에게는 거의 생명의 은인과 같습니다. 정말 그런 면에서 우리 박사님의 동상제막이 오히려 때 늦은 감이 있다는 그런 안타까움을 가지기도 합니다.흥남 철수 때 가장 감동 깊었던 장면이, 우리 국제시장에서 다 보셨겠습니다만 그때 메러디스 빅토리호입니다. 현봉학 박사님은 그 깊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을 설득해서 무기들을 다 버리고 거기에 피난민들을 탈 수 있을 만큼 태우게 하는데, 무려 만4천명의 피난민이 그 배에 탑승했습니다. 그리고 거제까지 내려오는 2박3일 동안 5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1만4천5명이 무사히 거제에 도착 할 수 있었습니다. 라루 선장은 그 전쟁 이후에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했던 1만4천5명의 피난민 수송, 그것도 흥남 앞바다에 가득한 기뢰와 풍뢰 이것을 헤치고 아무 사고 없이 도착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기적이라고 생각해서 전쟁 후에 수도사가 되셔서 수도원에서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 수도원이 운영난에 처해서 우리 왜관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그 수도원을 인수하게 되었는데, 그때 신부님들이 그 수도원에 갔을 때 라루 선장님이 수도사가 되셔서 마지막 말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그때 신부님들이 라루 선장님에게서 메르디스 빅토리호 이야기, 그리고 그때 있었던 현봉학 박사님의 활약을 자세히 알려주셨기 때문에 메르디스 빅토리호의 이야기가 전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을 한국의 쉰들러라고 그렇게 합니다만 쉰들러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훨씬 감동적이고 저는 아마 세계 전쟁사상 가장 아름다운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도 우리 현봉학 박사님의 동상제막이 조금 때늦었다는 생각과 함께, 정말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현봉학 박사님은 참여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고문을 하시면서 남북화해 협력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 이후 남북관계가 많이 후퇴한 현실에 대해서, 저는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 동상제막이 우리 현봉학 박사님이 가졌던 인류애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조국사랑,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또 남북화해와 협력을 추구했던 그 정신까지도 계승을 하고 가르침을 받는 그런 귀한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한국전쟁의 영웅, 의사 현봉학 박사 사진전 및 유물 전시회 개최 2023-09-08

  • 나눔 의료 전달식에서 한승경이사장 인사말 2021-07-05

  • (사)현봉학박사 기념사업회 1,00만 원 전달과 협약식 및 전달식 가져 나눔 의료 증서 전달식 가져 2021-07-05

  • 현봉학박사 자사전 발간 2018-03-28

    저자 현봉학|북코리아 |2017.12.19   책소개 ‘이스라엘 데이비슨 상’을 수상하다, 의학자 『현봉학』. 미국 임상병리학회(ASCP)가 주는 세계적 권위의 ‘이스라엘 데이비슨 상’을 수상했으며, 오랫동안 근무한 뉴저지 뮐렌버그 병원은 현봉학 박사의 업적을 기려 병원 병리학 연구실을 ‘현봉학 임상병리교실’로 명명하기도 했다. 또한 국내에서는 현대 임상병리학의 개념과 교육, 그리고 체계화된 검사실을 국내에 처음 도입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외에도 북한 의료시설 지원, 윤동주 비 건립, 서재필 재단, 중국 동포를 위한 봉사 활동을 펼치며 나눔을 실천하는데 힘썼다.   출판사 서평 영화 〈국제시장〉의 실존인물, 청년 현봉학 “장군, 부탁드립니다. 제발 우리 국민들을 도와주세요. 우리가 그냥 떠나버리면 저기 있는 피란민들은 중공군에 몰살당하고 말 겁니다.” 1,4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국제시장〉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흥남철수작전’의 한 장면이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 도입부에서 항구에 모인 피난민 철수를 미군 장군에게 간청하는 한 청년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며 화제에 올랐지만, 이 청년의 실존인물이 故 현봉학 의학박사임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1950년 12월의 흥남. 영하 30℃를 넘나드는 추위와 중공군의 포위망이 조여오는 급박한 상황에서 열세에 몰린 유엔군이 바닷가를 가득 메운 피란민을 두고 철수하려 하자 젊은 한국인 통역관이 미군 장성의 팔을 붙잡고 절박하게 호소하였다. 당시 의사 출신의 젊은 통역관이었던 현봉학(玄鳳學, 1922-2007) 박사는 포니 대령과 함께 에드워드 알몬드 미군 제10군단장에게 피란민들을 함께 데려가 달라고 눈물겹게 설득했다. 그의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알몬드는 결국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란민을 수송선에 태웠다. 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도 불리는 이 작전으로 10만여 명에 이르는 피란민이 흥남 항구를 통해 남한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나는 알몬드 소장을 찾아가 함흥 사람들의 사정을 설명하고 민간인 철수를 고려해달라고 간절히 청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함흥 기독교인은 아무 힘도 없는 나를 찾아와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때마다 나는 알몬드를 찾아갔다. …… 나는 그대로 물러설 수 없어서 함흥과 흥남의 20만 민간인이 어디로 피난을 갈 수 있겠느냐고, 적들이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마당에 갈 곳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하소연했다. 미국에서 중도에 공부를 마치고 귀국을 서두르게 한 하느님의 뜻에 매달려 계속 간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 본문 중에서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 국가보훈처 6.25전쟁영웅에 선정되다 현봉학 박사는 ‘한국의 쉰들러’로 추앙되며, 2014년 국가보훈처가 발표하는 6.25전쟁영웅에 선정되었다. 국가보훈처는 매년 이달의 6.25전쟁영웅을 선정하여, 6.25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운 국·내외 전쟁영웅들의 공적을 기리고 전후세대에게 알림으로써 이들의 올바른 국가관 확립에 기여하고자 선정해왔다. 국가보훈처는 2013년부터 6.25전쟁영웅을 선정하는 데 군인 이외에 민간인을 포함시키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현봉학 박사는 2014년 12월의 한국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는데, 현봉학 박사가 12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것은 흥남철수작전, 일명 ‘크리스마스 작전’이 12월 24일에 완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학자 현봉학, ‘이스라엘 데이비슨 상’을 수상하다 미국 임상병리학회(ASCP)가 주는 세계적 권위의 ‘이스라엘 데이비슨 상’을 수상했으며, 오랫동안 근무한 뉴저지 뮐렌버그 병원은 현봉학 박사의 업적을 기려 병원 병리학 연구실을 ‘현봉학 임상병리교실’로 명명하기도 했다. 또한 국내에서는 현대 임상병리학의 개념과 교육, 그리고 체계화된 검사실을 국내에 처음 도입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외에도 북한 의료시설 지원, 윤동주 비 건립, 서재필 재단, 중국 동포를 위한 봉사 활동을 펼치며 나눔을 실천하는데 힘썼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휴머니즘을 가능하게 한 분. 한평생 실천한 희생과 봉사, 그리고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늘 감사하며 살아온 故현 봉학 박사의 높은 뜻을 이제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본받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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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대령 12월의 6.25 전쟁영웅 선정기념 축하연 및 현봉학 박사 동상건립 2주년 기념식 2019-01-04